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문단 편집) === 가족 관계 === ||<-2> [[파일:9lJZ61K.jpg|width=100%]] || || {{{#ffc224 FDR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젊은 시절 사진}}} ||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는 반신불구가 된 남편을 대신해 영부인 활동도 활발하게 했고, 1945년부터 1951년까지 국제연합대사를 지내면서 1946년에는 국제연합인권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하는 등 인권과 평화 활동 측면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미국 내에서도 공연장을 구하지 못해 애먹던 흑인 가수들에게 링컨 기념관 공연을 성사시켜주는 등 인종차별철폐를 위해 힘썼다. 미국인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대통령 영부인으로도 손꼽힌다. 근데 부부 사이가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라, 대통령이 되기 전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부인 엘리너의 비서인 루시 머서와 추문을 일으켜 이혼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 실제 루스벨트는 엘리너와 이혼하고 루시와 재혼할 생각이었으나, 극구반대하는 어머니와 정치인생에 결코 도움될게 없다는 하우의 설득으로[* 아무리 이 쪽으로 동양에 비해 개방적인 미국이라 해도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이혼경력은 상대방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는 큰 흠집이었다. 하물며 그 이유가 아내의 비서와 바람나서라는 건 아주 물어뜯기 좋은 소재였다.] 루시와 만나지 않겠다는 다짐 속에 엘리너와 겨우 화해했고, 이후 루시도 다른 사업가와 결혼했다. 하지만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밀회를 즐겼다는 카더라가 있으며, 훗날 루스벨트의 임종을 지켜보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도 FDR 역시 그녀를 정치적 동반자로 아꼈는지, 엘리너의 저서 '내가 기억하는 것들'에 의하면 FDR은 보좌진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을 경우 식사 자리에서 자신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이때 FDR의 견해와 반대되는 견해를 심지어 약간은 짜증섞인 어조로 그녀가 말해도 빙그레 웃으며 자기 할 말만 하던 양반이, 다음 날 공식 석상에선 그녀의 의견을 마치 원래부터 자기 의견이었던냥 그대로 말해 당황하기도 했다고 한다. 자식으로는 엘리너와의 사이에서 슬하 4남 1녀를 뒀다. 자식들 중에서 고명딸인 안나 루스벨트 할스테드(Anna Roosevelt Halsted)[* Halsted는 결혼 후의 성이다.]는 부모를 도와서 퍼스트 레이디 직책을 대행하기도 했다. 한편, FDR은 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12촌 동생이다. 그리고 프랭클린은 상술되어있듯 시어도어의 [[조카딸]](질녀) 앨리너와 1905년에 결혼했다. 때문인지 프랭클린과 시어도어가 서로 숙부와 조카뻘이라고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지만 둘은 촌수가 먼 같은 항렬의 형제로, 근친이 아니라 사실상 남남이라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의 나이차는 23년으로 오히려 12촌이라는 촌수를 감안하면 평범한 편. 12촌 형제면 노인과 아기 수준으로 나이차가 많이 나는 경우도 있고, 남녀라면 서로 결혼도 가능한 촌수이다.[* 거기에 23세라는 나이차이도 사실 프랭클린의 아버지가 프랭클린을 늦은 나이에 재혼해서 본 [[늦둥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이복형인 제임스 루스벨트 루스벨트는 마찬가지로 12촌 동생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보다 4살이 많았다. 이 정도면 평범한 사촌과도 비슷한 나이일 정도이다. 거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이복형이 낳은 조카들보다 나이가 어릴정도로 늦둥이였기에 그나마 이정도 나이차이가 났던 것이다.][* 유교주의로 깐깐한 한국에서도 8촌 이상이면 혼인이 가능할 정도다.] 둘은 당적도 달랐지만[* 시어도어는 [[공화당(미국)|공화당]], 프랭클린은 [[민주당(미국)|민주당]]원이었다. 실제 시어도어가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에도 프랭클린은 [[우드로 윌슨]]을 지지했다. 이는 18세기에 루스벨트 집안이 이미 갈라져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온 영향도 있고, 공화당엔 이미 시어도어의 아들들이 진출해있어서 [[블루 오션]]을 노린 것 아니냔 추측도 있다. 다만 성향은 진보 성향인 점이 같다.] 사적으론 꽤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프랭클린은 시어도어 관련 서적도 읽어볼만큼 그를 존경하면서도 언젠가는 넘어야할 [[라이벌]]로 여겼다고. 그리고 실제로 '''넘어섰다'''. 사실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미국 대통령 중 꽤 비중있는 인물이지만,[* 그 유명한 [[러시모어 산]]의 네 얼굴 중 하나가 시어도어 루스벨트다.] 그럼에도 대중들은 루스벨트라 하면 주로 존재감이 더 높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시어도어 루스벨트보다 많이 떠올리는 편이다. 한편, 시어도어는 일본 문화에 심취한 소위 원조 [[와패니즈]]로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길을 열어놓은 반면, 프랭클린은 [[무기 대여법]]과 대일 석유 금수 조치를 통해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제동을 걸었고 결국엔 [[태평양 전쟁]]으로 폭망시켰다는 점도 재미있는 점. 이런 대조적 행보로 인해 일본 우익들은 지금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 제국의 전성기를 만들어줬다고 좋아하는 반면,[* 다만 [[시어도어 루스벨트]] 문서에도 나오듯 한편으로는 일본을 경계하기도 해서 일본인들이 무조건 좋아할 일은 아니다.]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 제국]]을 침몰시킨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특히 후임 대통령으로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FDR 시절부터 일명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장본인인 [[해리 S. 트루먼]]은 철천지 원수마냥 취급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식으로 타국의 역사를 자국 문제와 대입해 감정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심도깊은 역사 인식에 방해가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시어도어 시절엔 일본과 친선 관계를 맺는 것이 미국 입장에서 나쁠 게 없었고, 반대로 프랭클린 시절엔 일본의 폭주와 선빵질로 인해 일본과 싸운 것일 뿐이다. 두 지도자 모두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자기들 딴엔 적절한 정책을 펼쳤을 뿐이지 일본에 대한 개인적인 호불호가 의사결정의 절대적인 요인까진 아니었다. 게다가 프랭클린 시대에는 일본이 전체주의 [[천황제 파시즘|유사 파시즘]]으로 미쳐 돌아가던 시절이였지만, 시어도어 시대 일본은 당대 트렌드인 제국주의 흐름에 동참한거 이외에는 나름 온건한 헌정보수~리버럴들이 정치를 주도했기에 서방과 딱히 충돌할 이유도 없었다. 즉, 한국이나 일본이나 서로 현재 자기들의 국익 문제나 민족 감정으로 두 대통령을 재단하고 있는데 이러한 판단은 두 대통령에 대한 한쪽에 치우친 판단을 심을 우려가 있다. 실제 한일의 인식과 별개로 미국 내에서 시어도어와 프랭클린은 둘 다 미국식 진보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리버럴, 좌파들에게 비슷한 존경을 받고 있다. (가령 힐러리, 오바마나 샌더스 등 미국의 리버럴, 진보 거물들도 두 대통령 모두에게 존경을 표하며 둘의 진보적 업적을 기리고 있다. 다만 시어도어의 제국주의적 측면은 이쪽도 딱히 옹호하진 않는다.) 반면에 미국의 강경보수파들은 특히 국내 정책에선 둘 다 그들 기준 '사회주의자'라며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즉, 현대 미국 사회에서 둘의 포지션과 위상은 생각보다 크게 다르지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